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드룬 부르비츠 (문단 편집) == 유소년기 == [[파일:dJNrNjv.jpg|width=500]] [[파일:q55cZdy.jpg]] 어린 시절, 아버지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파일:ENhUovI.jpg]] [[아돌프 히틀러]]와 찍은 사진. '''[[하인리히 힘러]]는 소문난 애(공)처가이자 [[딸바보]]였다'''. 구드룬은 [[뮌헨]]에서 태어나 어머니 마르가레테와 함께 [[뮌헨]]에 살고 있었는데 힘러는 수시로 아내와 딸을 [[베를린]]으로 불러들였고 매일같이 가족에게 전화를 하고 매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힘러는 집무 중에도 딸을 곁에 두었고 '내 강아지(Püppi)' 라고 부르며 아꼈다. 구드룬은 왜 또래의 남자친구들이 자기 근처에도 접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매우 의아해하면서 자신이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는 신세에 대해 푸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인리히 힘러|아버지]]가 누군데 감히-- 힘러는 이따금 자신이 시찰할 곳에 딸을 데리고 가곤 했다. 그곳은 193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최초의 강제수용소 [[다하우]]였다. 여기 가서는 아이한테 수감자들을 보여주면서 어떤 표시가 포로고 수감자라고 설명해 주었으며, 동료들과 함께 포로들의 집결 장소임을 알리는 표시판 아래서 단체로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구드룬은 아버지가 승진 가도에 오르는 걸 경탄했다고 한다. >사랑스런 아빠가 라이히의 내무 장관이라니 기뻐서 미칠 것 같아. 그렇게나 명성이 높은 아빠. [br] - 1943년 8월의 일기 그녀의 유년기에는 총통 히틀러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힘러네 집에 찾아와서 식사를 함께 하기도 하고, 매해 첫날 만날 때마다 인형이나 초콜릿을 선물로 줬다니 싫어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1945년 5월(16세 무렵) 그녀와 어머니 마르가레테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주에서 미군에게 붙잡힌다. 힘러의 옛 참모장인 [[카를 볼프]]가 [[볼차노]][* 오스트리아 국경에 가까이 있는 이탈리아의 도시로, 유럽의 주요 교통로다.]의 별장에서 체포되면서 '나를 독일로 돌려보내준다면 당신들에게 힘러의 아내와 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겠다'고 거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 각지의 수용소를 전전했는데, 혹시 대중이나 당원들이 일으킬지 모르는 폭력 사태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호위대가 따라다녔다. 피렌체의 영국 심문센터의 한 경비원은 "만약 당신들이 힘러의 처자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갈가리 찢겨져 죽을 겁니다'라고 했다니 말 다했다. 구드룬이 아버지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 때였다.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1945년 5월 23일 자살했지만, 구드룬은 한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힘러의 아내이자 그녀의 어머니인 마르가레테가 미국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결국, 큰 충격을 받고 거의 3주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고열에 시달렸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구드룬은 그가 청산가리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녀에게 아버지가 자살한다는 것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구드룬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관리하고 있던 영국군 지휘관에게 구드룬은 하루라도 빨리 떼어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며, 쓸모도 없는데다 보호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슈미트'라는 가명을 부여했지만 후술하듯 오래가지는 못했다. 구드룬은 수감 중 음식이 초라한 데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결국 협상에서 승리하여 어머니와 함께 장교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 때 "이제부터 제 성은 힘러예요. 더 이상의 가명도 연극도 필요 없어요."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1946년 11월, 전쟁범죄와 전혀 연관이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아버지와 전쟁에 관한 대화를 했는지 질문받았을 때) "저는 아버지와 전쟁이나 그런 비슷한 것들에 관해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어요." 석방되기 전까지 구드룬은 어머니와 함께 탈나치화 과정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마르가레테는 석방될 때 오히려 떠나기를 거부했다. 무일푼인 데다 린치를 당할까 두려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수도원으로 '정신박약자들'이라는 명목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1952년까지 그곳에서 지냈지만... 그곳에서도 그녀는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개신교인 여성들이 구드룬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해보았지만, 그녀는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 '나는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 라며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힘러의 집안은 가톨릭 집안이였기 때문이다.[* 힘러는 젊었을 적에는 열렬한 신도였으나 이후 가톨릭 신앙을 버렸다.] 그곳의 사람들에게 구드룬은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고, 떠날 때까지 울거나 웃는 등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